🏔고도와 금속성을 향으로 만들면⚔️
탑노트에 몰려 있는거 치고 베르가못, 레몬, 자몽이 이상할 정도로 과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처음부터 그것만 찾겠다고 작정하고 맡으면 분명 시트러스는 있는데, 조금이라도 전체를 보면 과즙이나 과육이 느껴지는 프루티함과는 완전히 다름.
오히려 저것들이 몇 요소가 뒤따라오는 차갑고 매캐한 아로마틱 마른 우디함과 한 덩어리로 엉기면서 고도가 높고 기온은 낮고, 눈은 설원이 될 만큼 쌓여 있는데 공기는 몹시 건조한 장소를 만들어내버림...
진짜딱 겨울 산행 끝에 정상에 올라섰을 때 코와 폐로 훅 들어오는 그 날카로운 공기 냄새가 나요. 정확히는 냄새라고 부르기도 애매한데ㅋㅋ 처음 맡았을 당시 겨울도 아니었음에도 계절이랑 장소가 통째로 바뀐 기분이었어요ㅋㅋ
큰 틀에서는 파우더리함과 용연향 계열의 깊은 머스키함이 쟁쟁하게 맞붙는데, 여기서 파우더리는 제가 흔히 떠올리는 분내나 답답한 화장가루하고는 결이 아예 달라요.
꼭 무슨 얼음이나 금속 표면을 곱게 갈아 공중에 흩뿌려 그걸 그대로 맞은 듯한 차갑고 무기질적인 파우더리함에 가까움.
반대로 그 아래의 용연향은 피부에만 붙는 게 아니라 주변 공기까지 리치하고 우아하게 움켜쥐듯 깊게 퍼집니다.
위는 날카롭고 차갑고 건조한데 아래는 사람의 체온과 살갗을 붙잡고 있어서 이 극단적인 대조가 정말 미치게 좋음ㅠㅠ
자연 속에 있는 향이라기보다 등산 끝에 완전히 자연에 압도당한 경험 자체를 후각화한 것 같아요.
기회가 생기면 바로 75ml짜리로 구매할것임
아 그리고 이거 오프닝과 본격적인 잔향 사이에 아주 희한한 냄새가 잠깐 끼어듭니다.
바로 미나리요ㅋㅋㅋㅋ
그것도 밭에서 막 뜯은 생미나리가 아니라 용기 안에 뜨거운 증기와 함께 갇혀 있다가 뚜껑을 열었을 때 훅 끼쳐오는 미나리 향.. 노트에는 당연히 미나리가 없어서 한참 의아했는데 걍 궁예하자면 주니퍼와 향신료, 베티버와 쌉쌀한 시트러스가 한순간 겹치면서 그런 푸르고 싸한 향나는 채소의 환영을 만드는 것 같아요.
심지어 찾아보니 다른 시향자 중에는 이 향에서 fresh celery를 느낀 사람도 있더라고요ㅋㅋ 미나리가 water celery, water parsley 계열의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걸 생각하면 완전히 혼자 헛것 맡은 건 아니었던 모양.
향수 이름을 몰랐어도 정말 설산를 떠올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도와 온도와 습도를 향으로 느끼게 만드는 데에는 무서울 만큼 성공한 향수라고 생각합니다.
산의 냄새를 담은 게 아니라 산 정상에서 사람이 느끼는 자기 몸의 크기까지 담아낸 느낌!!